오늘은 창덕궁 세 번째 이야기다. 1,2편을 보고 오면 궁궐 출입문부터 들어올 수 있음!
세계유산 창덕궁, 내가 사랑하는 서울의 궁궐 (1. 돈화문~금천교)
세계유산 창덕궁, 내가 사랑하는 서울의 궁궐 (2. 진선문~인정문)
세 번째 이야기, 인정전부터 선정전까지
5. 최고의 권위를 지닌, 인정전
드디어 정전 앞에 도착했다. 인정전은 창덕궁의 정전으로 태종 5년인 1405년 창건 당시 지어졌다가 임진왜란 당시 소실되어 광해군 때 재건 후 화재로 다시 소실, 현재는 순조 때 또다시 화재로 소실된 후 다시 지어진 것이 지금 까지 이어져오고 있으며 현재 국보로 지정되어 있다.
"인정"이라는 이름의 뜻은 어질 인(仁) 자를 써서 말 그대로 '어진 정치를 펼치다.'라는 의미를 담고 있다. 인정전은 세자의 책봉이나 왕 혹은 왕세자의 가례 등 국가의 공식적인 크고 작은 행사를 치르던 권위가 가장 높은 전각이라고 할 수 있다.
보통 인정전 앞 너른 마당에서 행사가 많이 치러졌는데 이렇게 정전 앞 너른 마당을 '조정'이라고 한다. 사극드라마에서 "조정 대신들에게 명한다."와 같은 대사를 많이 들어봤을 텐데 그 조정이 정전 앞의 너른 마당을 일컫는 말이라고 볼 수 있다.
정전 한가운데 어도를 중심으로 좌, 우 양쪽에 품계를 나타내는 '품계석'이 세워져 있고, 인정전을 바라보는 방향 기준 오른쪽이 문관, 왼쪽이 서관이 서게 되며 각각 동반, 서반으로도 일컬어 합쳐서 '양반'이라고 부른다.
이 품계석은 정조 때 만들어졌다고 알려져 있는데 품계석이 없었던 이전에는 무질서하게 서있는 경우가 많아 품계석을 설치했다고 알려져 있으며 이 또한 왕권 강화의 일환으로 추측할 수도 있지 않을까 생각된다.
6. 정치를 널리 펼쳤던, 선정전
선정전은 창덕궁의 편전으로 왕의 집무실로 사용된 전각으로 선정전 또한 임진왜란 당시 소실 되었다가 광해군 때 재건하였으나 인조반정이 일어나며 다시 화재로 소실되어 인조 때 재건된 것이 지금까지 이어져오고 있다.
전각의 이름인 "선정"의 뜻은 베풀 선(宣) 자를 써서 '널리 펼치는 정치를 하다.'라는 뜻을 품고 있다. 규모는 인정전보다 훨씬 작은데 말 그대로 임금이 정무를 보던 공간으로 고위관직 위주의 관리들이 출입하였기 때문에 규모가 정전만큼 클 필요는 없었다고 볼 수 있다.
임금이 정무를 볼 때 항상 옆을 따르며 무언가를 적는 이들이 있었는데 그들을 '사관'이라고 하는데 임금의 왼쪽 사관은 임금의 말씀을 적고, 오른쪽 사관은 임금의 행동을 적는다. 이 기록들이 모여 '사초'가 되며 이 사초가 승정원일기 등 다른 기록들과 더불어 "조선왕조실록"의 바탕이 된다.
특히 선정전은 중종의 계비인 문정왕후가 명종 대신 수렴청정을 했던 장소이기도 하며, 조선 후기에는 승하하신 왕과 왕비의 빈전 또는 혼전으로도 많이 사용되었다.
선정전 앞에는 현재 넓은 공터가 있는데 사실 조선시대에도 이렇게 공터로 비어있었던 것은 아니었다. '구중궁궐'이라는 말이 있듯이 실제 궁궐은 굉장히 빼곡하게 건물들이 모여있었으며, 선정전 앞 공터 또한 임금을 보좌하던 '관청'들이 모여있었다. 대표적으로 왕의 비서기관인 '승정원'이 있었으며, 지금 현재 선정전 맞은편에 있는 기념품 매장으로 활용되고 있는 장소 또한 '빈청'이라고 하는 관청으로 신하들이 선정전에 들어가기 전 대기하며 회의를 하던 장소로 관청 중에 하나였다고 볼 수 있다.
여기까지가 정치의 공간인 '외전'이며, 이후에는 생활공간인 '내전'으로 들어가 보자!
네 번째 편은 이곳! ↓↓
세계유산 창덕궁, 내가 사랑하는 서울의 궁궐 (4. 희정당~대조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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