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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상정보

세계유산 창덕궁, 내가 사랑하는 서울의 궁궐 (2. 진선문~인정문)

by 오메가데우스 2023. 2. 28.

2년 전 창덕궁 달빛기행 관람하며 인정전 월대 위에서 바라보며 찍은 인정문 야경

 

처음 블로그를 시작하면서 글을 꾸준히 잘 올릴 수 있을까 사실 걱정이 많이 앞섰다. 그런데 의외로 글을 남기는 게 이렇게 재미있을 줄은 정말 생각지도 못했다. 더욱 부지런히 올려볼 생각!

 

오늘은 창덕궁 이야기 두번째. 첫 번째 이야기를 보고 오면 궁궐의 시작부터 볼 수 있음!!

 

세계유산 창덕궁, 내가 사랑하는 서울의 궁궐 (1. 돈화문~금천교)

 

세계유산 창덕궁, 내가 사랑하는 서울의 궁궐 (1. 돈화문~금천교)

현재 서울에는 조선시대의 궁궐이 문화재로 남아있는데 궁궐이라는 것에 대해 간단히 설명해 보자면 '궁'이라는 말과 '궐'이라는 말이 합쳐진 단어가 바로 "궁궐"이 되는 것이다. 먼저 '궁'이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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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번째 이야기, 진선문부터 인정문까지

 

3. 백성의 소리를 듣고있었던, 진선문

 

 돈화문을 지나 금천교를 건너 비로소 궁궐 안으로 들어오면 보이는 문이 진선문인데 문의 이름인 "진선"'임금님께 바른말을 올리다.'라는 의미를 담고 있다.

 

 이 진선문에는 우리가 익히 들어 잘 알고 있는 '북'이 하나 설치되어 있었는데 바로 "신문고"이다. 신문고는 태종 때 처음 설치되었는데 많은 사람들이 알고 있는 대로 백성이 임금에게 억울한 일을 바로 알리고자 할 때 이 신문고를 두드릴 수 있도록 한 것이다. 하지만 다시 생각해 보았을 때 평범한 백성이 돈화문을 들어와 금천교를 건너 진선문에 달린 신문고를 과연 쉽게 두드릴 수 있었을까? 내가 해설을 나갔던 어느 날, 이 이야기를 들으신 나이가 지긋하신 어르신 관람객 분께서 해설이 끝난 후 이런 질문을 하셨다. "아니 그럼 신문고를 두드리기 어려웠으면 조선시대에도 전시행정이 있었던 거네요?"

 물론 신문고 자체가 실제 용도로는 유명무실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긍정적인 방향으로 생각해 보자면 이 신문고 자체가 임금께서 그만큼 백성들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이고 있다는 상징적인 의미가 훨씬 더 컸다고 볼 수 있다.

 

 그럼 실제 백성들은 어떻게 억울함을 고했을까? 보통 사극에 보면 상소문을 올린다고 하는 장면이 나오는데 이렇게 글로써 알릴 수 있었으나 문맹률이 높았던 조선시대에서는 가능한 이들이 많지 않았고, 글을 모르는 낮은 백성들의 경우 '격쟁'을 통해 억울함을 고했다고 한다. 격쟁은 임금께서 행차하시는 길에 행차길을 막아서고 징이나 꽹과리 등을 마구 두드려 이목을 집중시켜 행차길을 막고 억울함을 고했다고 하며, 실제로 조선 후기의 성군으로 알려진 정조의 경우 이 격쟁을 통해 약 4,400여 건의 민원을 대부분 3일 이내로 해결을 하셨다고 한다.

 

4. 정전을 향하는 문. 중요한 의식공간이었던, 인정문

 

 진선문을 들어와 어도를 따라 안으로 더 들어오면 정전으로 들어가는 문인 인정문이 보인다. 이 인정문에서는 굉장히 중요한 의식이 치러지는데 조선시대에 가장 중요한 의식을 한 가지 꼽아보자면 바로 "즉위식"일 것이다. 왕의 즉위식이 문에서 치러지다니 의문이 들 수 있는데 물론 정전 앞에서 치르는 경우도 있었지만 생각보다 드물었고, 사실 대부분은 이 정전 앞 문에서 치러졌다고 볼 수 있다. 

 

 왕이 즉위하는 형태를 보면 크게 세 가지로 나눌 수 있는데 첫 번째가 바로 '사위'로 인한 즉위이다. 사위는 임금께서 승하하시고 아들인 세자가 보위를 잇는 형태인데 보통 사극드라마를 보면 임금께서 돌아가시면 모든 신하와 백성들이 슬피 울며 곡을 하고, 즉위식 장면이 나오는데 굉장히 화려한 모습을 볼 수 있다. 하지만 드라마와는 달리 실제로는 대부분 선왕께서 승하하신 후 평균 일주일 이내에 즉위식을 치르기 때문에 기간 상으로 국상 중이어서 우리가 화면에서 접한 것처럼 그렇게 화려하게 즉위식을 치를 수가 없고, 의외로 굉장히 조용하고 엄숙한 분위기에서 간소하게 치러졌다고 한다.

 두 번째는 '양위'로 인한 즉위이다. '선위'라고도 하며 사위와는 반대로 양위는 임금께서 살아계시지만 상왕으로 물러나고 세자에게 왕위를 물려주는 형태이다. 대표적으로 한분만 꼽아보면 한글을 창제하신 세종이 양위로 즉위한 왕으로 볼 수 있다.

 세 번째는 '반정'으로 인한 즉위이다. 반정은 현재의 부덕한 왕을 몰아내고 새로운 왕을 세우는 형태인데 조선시대 이러한 반정이 두 번 있었으며, 연산군을 몰아내고 왕위에 오른 "중종반정", 광해군을 몰아내고 왕위에 오른 "인조반정"이 있다. 공교롭게도 이 두 번의 반정 모두가 창덕궁에서 발생했고 특히 인조반정 때에는 궁궐에 불도 굉장히 많이 났다고 한다.

 

이후에는 본격적으로 정치의 공간으로 들어가 보자!

 

세 번째 편은 이곳! ↓↓

세계유산 창덕궁, 내가 사랑하는 서울의 궁궐 (3. 인정전~선정전)

 

세계유산 창덕궁, 내가 사랑하는 서울의 궁궐 (3. 인정전~선정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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